1루수로서의 경험과 모린지에서의 특훈으로 만들어졌고, 박수로 성장한 명 플레이
자 이언츠가 제1기 황금시대를 구축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말해지는 것이 '모린지의 특훈'이다. 그 주인공으로서 노크를 받은 것은 당시 불과 19살의 소년이었다. 타는 듯한 땡볕에서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높은 바운드로, 때로는 땅을 타고 오는 노크를 숨을 헐떡거려도, 넘어지도, 계속해서 날아왔다. 그런 가운데 앳띤 소년은 하나의 기술을 터득해 갔다. 후에, 시라이시 토시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역싱글 포구'이다.
학교를 막 졸업한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년을 팀 재건의 '제물'로
오 래간 만에 타이거스의 전 감독이며 현역 시절에는 '한 시대를 장식한 명 유격수'로 평가받고 있는 요시다 요시오를 만나서 '과거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잡담에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묻지도 않았는데, "후지모토 아츠시가 일취월장했더군"이라고 혼잣말을 하듯이 말하고서, "토리타니 (타카시) 효과일까?"라고 덧붙였다. 2004년 타이거스의 유격수 자리를 차지하는 등 시즌이 개막하기 전에는 여러가지 화제를 뿌렸던 엘리트 루키라고 해도, 충실하게 성장한 후지모토 아츠시를 능가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유격수와 맹연습'이라는 조합에서는 언제나 시라이시 토시오(1950년부터는 시라이시 카츠미)의 "먼 과거의 회상록'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코료중학을 졸업하지마자 토쿄에 왔기에, 어디가 동쪽인지 서쪽인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을 뿐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보니, 정말 (그때의 나는) 어린아이였다."
번 득이는 커다란 두 눈, 굵은 눈썹, 꽉 다문 입술, 땅딸막한 체구 등 오랜 영화 팬이라면 다들 알고 있겠지만, 1930년대에 제임스 캐그니라는 갱영화의 주인공을 맡았던 몸집이 작은 명배우가 있었다. 이 명배우와 시라이시 토시오는 상당히 닮았기에, '일본의 캐그니'라고 불렸다. 얼핏 보면, 무서운 외견이지만, 말년에 카프의 감독과 자이언츠의 헤드코치나 2군 감독을 역임할 때에는 어린 선수나 담당 기자가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따랐을 정도로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1936년에 창단한지 얼마 안되는 자이언츠에 입단했을 때에는 "주변의 모든 선수들은 토쿄 6대학에서 활약한 스타 플레이어뿐이었다. 내가 나설 자리는 없었다. 오로지 다른 선수들의 짐꾼"이었다.
그런 '중학생(지금으로 치면 고교 졸업생)'이 팀의 재건을 위한 "중심"이 되었다.
두 번째 미국 원정에서 귀국한(1936년 6월) 자이언츠는 (후지모토 사다요시의 표현에 따르면) "미국에 갔다온 것을 자랑하고, 자만심에 빠진 오합지졸"이었다. 자이언츠가 미국 원정을 하고 있을 때에 감독으로 취임한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너무나도 한심한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한 때는 "사임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이언츠로부터 사임이 반려된 그는 팀 재건을 위한 "조언"으로 미하라 오사무를 설득해서, "해이해진 선수"에 대한 외나무 승부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지금은 "자이언츠의 전통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말해지는 "모린지의 특훈"이었다.
"당시에 나는 아직 애숭이였기에, 그러한 복잡한 팀 사정은 전혀 알지를 못했다. 후에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아아 그랬구나'라고" 알 수 있었다. 시라이시 토시오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때의 연습만큼은 잊으려고 해도 일 수 없다."고 말했다. 새삼스럽게 당시의 일을 떠올린 것은, 야구전당에 헌액되는 것이 결정된 후에 토쿄 사사즈카역 부근의 찻집이었다. 약 2시간 동안에 "한잔 더 해도 괜찮나"라고 말하면서, 커피를 세잔이나 마시고 나서, 평소의 눌변과는 달리 전혀 딴 사람인양 유창한 말로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만큼 지울 수 없는 강렬한 추억이었던 것이다.
"8월 말 무렵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매일 푹푹 찌는 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군마에서 좀 외딴 곳인, 주변에는 드문 드문 초가지붕밖에 보이지 않는 자갈 투성이인 그라운드로 이끌려 갔다. 그라운드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어질 어질했다."
거기에서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당시 33세)는 시라이시 토시오를 대상으로 한 엄청난 노크가 시작되었다.
"야마토 큐시(당시 최고의 야구 평론가)의 글로 인해 유명세를 탔지만, 당시의 나는 완전히 질려 버렸다."
그 야마토 큐시의 글
" 후지모토 (사다요시)의 노크는 너무나도 교묘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높은 바운드로, 때로는 지면을 기었다. 운에 맡길 수 없었다. 운에 맡기고 스타트를 끊어려고 하면, 그 반대를 파고들었다. 늦더위는 오후 3시, 기상대가 화씨 94도라고 발표한 혹서 지옥이었다. 하지만, 시라이시 (토시오)를 대상으로 한 가열찬 노크는 끝없이 계속되었다. 결국에는 위 안은 텅 비었는데도 토했다. 토하고 쓰러졌다. 그래도 노크는 계속되었다."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자만심에 빠져서 연습도 하지 않던 (사와무라 에이지, 빅터 스타르핀 등) 투수진이 자발적으로 런닝을 시작했다"고 말하였고, 그것은 시라이시 토시오를 대상으로 한 노크 훈련으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 후였다. 사람의 마음에 호소한 것이 땡볕 아래에서의 노크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그 때에 "이것으로 자이언츠는 부활하였다고 확신하였고, 시라이시 토시오에게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포지션에서는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한 스타군단 속에서 시라이시 토시오는 과묵하고 순수한 소년이었다. 그러한 소년을 선택해서 일종의 '제물'로 삼은 것은 "플레이는 엉성하지만, 강한 손목을 가졌기에 단련시키면 제대로 된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고 생각한 점도 있었다.
무리라고 생각했데, 타구가 날아왔다
그리고, 시라이시 토시오는 말했다. "그 견딜 수 없는 터무니 없는 노크를 받는 가운데, 나는 한가지를 성책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역 싱글 포구'다.
" 나는 원래 다리와 어깨에는 자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땅볼을 포구하는데 자신이 없었기에, 신중하게 확인하고 확인한 후에 잡아서, 아슬아슬한 순간에 1루에 던져서 간발의 차이를 연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깨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에 한발 나아가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도저히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3유간 깊숙한 땅볼에 손이 미치게 되었다. 한 때는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가능한 최대한 쫓아가서 왼손의 글러브를 역 싱글로 냈더니 쑥하고 타구가 날아들어왔다. 무의식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때 무의식적으로 역 싱글로 글러브를 내민 것은 아마도 코료 중학 시절에 오랫동안 1루수로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루를 지키고 있을 때에, 2루 방향에서 악송구가 왔을 때에는 항상 역 싱글로 잡았다. 그러한 습관이 우연히 나온 것이었다."
공식전에 유격수로 기용되게 되었고, 그 때에 3유간의 깊숙한 땅볼을 역 싱글로 잡아냈을 때에는 스탠드에서 박수갈채를 받았다.
" 스스로는 의식하지 않았지만, 그것(박수)에 주의가 미쳤고 매우 기뻤다. 그러자, 점차적으로 그것을 의식해서 연습하게 되었다. 만약 나의 이러한 포구도 '파인 플레이'라고 말해지는 것 속에 포함될 수 있다면, '미기'라는 것은 이러한 것은 아닌가라고 경험상 생각했다. "
시라이시 토시오는 자신을 단련시킨 노크를 웃으면서 "터무니 없는 노크"라고 말했다. 상식이나 이론을 넘은 세계이다. 그런 시라이시 토시오가 그로부터 28년 후인 2번째로 히로시마 카프의 감독을 맡았던 1964년에는 모회사인 토요공업의 컴퓨터를 이용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서 일본 프로야구사상 처음으로 "오 (사다하루) 시프트"를 만들어낸 것이 야구 인생의 묘미이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감독인 루 부드로가 테드 윌리엄스를 상대로 고안해 낸 특이한 시프트는 그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부드로 시프트"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시라이시 시프트"라고는 불리지 않고 있다.
"내가 타인의 아이디어을 받아들인 것이기에, 이렇게 불리던 저렇게 불리던 상관이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시라이시 토시오의 프로필
1950 년부터 시라이시 카츠미로 개명. 1918년 4월 15일 히로시마현에서 출생해서, 코료 중학시절에는 1루수로서 1935년 봄 코시엔에 준우승을 하였다. 1936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서 유격수로 컨번전하였고, 제1기 황금시대의 일원이었다. 세계대전 후에는 1946년에 퍼시픽과 논프로 팀을 거친 후에 1948년에 자이언츠에 복귀하였다. 1950년에 히로시마 카프가 창단하면서 이적하였다. 이 해에 베스트 나인에 뽑혔다. 1953년부터 감독을 겸임하였고, 1955년에는 1루수로 전향하였고, 1956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감독은 1960년까지 역임하였다.
역 싱글 포구의 명수로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1962년부터 1965년까지 다시 카프의 지휘봉을 잡았고, 1972년과 1973년에는 조감독을 맡았고, 1985년에는 야구전당에 헌액되었다. 2000년에 심부전증으로 사망한 그의 현역 통산 성적은 1,359경기에 출전해서, 1,574안타, 84홈런, 571타점, 210도루, 타율 0.256 등이다.
일본의 야구 전문지인 [주간 베이스볼]에 2004년 6월 14일에 게재된 내용으로, 원저자는 야구 전문 기자로 유명한 타무라 다이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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