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타오르는 꿈

농우잡록 | 2007/08/28 19:08 | 농우
'평생을 태권도를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건 아무래도 남들에 대하여 자랑하는 말일 뿐이다. 기껏해야 대학졸업할때까지이고, 한참이나 지나서 몇년 태권도장 운영을 했을 뿐이다. 그래도 햇수로 따진다면 25년여 태권도를 하긴 한 셈이다.

당연히 친구도, 지인들도 모두 그쪽에 있는것 같고. 아니면 그쪽 출신들인것 같다. 우리같은 사람과는 생각하는 방향부터가 다르다. 생활태도야 말해 무엇하랴. 친구를 만나는 일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일도 모두가 다르다. 사람이 이렇게도 다르구나 하는 생각도 가끔 하곤 했다.

어쨌거나 태권도로 승승장구하고, 젊은 시절에 돈도 많이 벌었다. 놀러도 많이 다녔다. 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야 이제와서는 그야말로 '우리집에 금송아지 있다'는 격이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만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거냐' 하는 식이다. 사람들이 보는건 현재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참으로 이상한 존재다. 생각은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있다. '내가 왕년에는' 바로 이런 생각. 자존심은 최고로 올라갔던 선에서 머물러 있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다 그럴것인데, 특히나 그놈의 자존심이란 것은 한번 올라가면 절대로 내려오지 않는다. 기름값처럼 하늘하늘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망해버린 사업, 거덜나 버린 살림. 남아있는 것은 방2개짜리 전세집하나와 아들 둘뿐이다. 아내에게도 그리 살갑게 대하지 못하는 그 성격이며 상황. 그러나 나이들다보니 생각은 깊어져서 자존심을 함부로 내세울 수도 없다. 가슴속에 한웅큼 이물감을 매달고 산다.

애꿎은 담배만 죽어라 피워대는데, 어디가서 '능력없으면 끊어'소리 듣게끔 상황이 되어버린 것도 오래된 일이라.

요즘 '막장'이라는 말들을 자주 쓰던데 이런건 아닐까 싶다. 움치고 뛸래야 어찌 뛰어볼 수도 없는 상황. 그리고 그 상황을 만들어놓은것이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자각은 더욱 더 사람을 움츠리게 만들어버린다.

몸은 수십년간 혹사시킨 격투기로 인해서 여기저기 골병이 들어있다. 자존심은 그 덕에 하늘 높은줄 모르고 솟아있다. 웬만한 일, 웬만한 수입엔 양이 차질 않는다. 다른 녀석들은 노가다도 잘 나가고, 이리저리 아무 일이나 닥치는대로 하면서 하루 1만원이라도 벌어보려고 기를 쓰지만 이녀석은 발을 내디뎠다가도 이틀을 버티지 못한다.

수십년만에 다시 만난 친구들, 몇년 되지 않았는데 모두 떨어져나가 버렸다. 설상가상. 성격은 대쪽같아서 옳지 못한것 보고 그냥 넘기지를 못한다. '차라리 내가 숨고 말지 그꼴은 못본다' 이런 식이다. 주변에 친구들이 모일 상황이 전혀 되지 못한다. 이놈아 맑은 물에 고기가 어찌 사냐, 더구나 그 물에 영양분도 하나도 없다면...

나이가, 오로지 나이가 그런 서글픔들을 모두 버티게 해준다. 그리고 그 나이가 자식들 보면서 이기게 해주는 동시에 자식들 보면서 더욱 초조하게 만들어준다. 매번 굳게 결심하지만 어설픈 일자리에 나갔다가는 며칠만에 포기하고 돌아서기를 몇번. 스스로로 한심하다고 하지만 어쩌랴. 이제와서 뭘 어쩌랴

이러다보니 생활은 당장 쌀팔아먹기도 힘들게 되어있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어디가서 도둑질도 못하는 성격이니 그대로 앉아서 굶어야 할 판인거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있는데도 일자릴 구한다는게 쉽지가 않다. 죽어라고 구해주면 며칠 못가서 튀어나오고 마니...

이런저런 제안들이 들어와서 근래 들어 래커면허에 대형면허도 따는데, 머리는 좋은지 시험은 봤다하면 일차에 모두 합격이다. 손재주에 감각도 있긴 한데...

그러다가 녀석이 LNG기지의 수영장에 가게되었다. 거기 자기가 가본중에 제일 잘된 시설이라는 스쿠버풀장을 보게 되었다. 이래저래 안되는 인생, '이러다가 죽을건가봐'하고 만날때마다 지겹게도 힘없는 소리 해대던 녀석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생기가 아니라 저게 뭘까? 의욕이 불타오른다고 해야 하나?

수영이며 스킨스쿠버를 제일 좋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했고, 실제로 몇번 같이 가기도 했지만 저정도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여기서 일할 수 있다면 월급 안 받아도 좋다'는 식이다. 자식들 먹여살릴 일도 까마득한 놈이

그 스쿠버풀장에 직업을 마련해 보겠다고 뛰어다니고 있다. 돈을 빌려서 아이들 밥을 먹여야할때도 늘청늘청 기운없이 걸어다니던 놈이 머리를 싸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있다. 덕분에 나도 많이 귀찮아졌다. 그러나 즐거운 일이다. 죽은 사람이 하나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있는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기 일 수 밖에, 그러나 해보는데 까지 해보겠다고 뛰어다니는 녀석을 보니 참, 어이가 없을 정도다. 자식들 공부가르치는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놈이고 실제로 그것때문에 없는 살림에도 이사를 감행했던 놈인데, 이거야 원

사람은 말이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꿈'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하고 싶다'는 그 열망을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우리 모두 가슴속에 그런 꿈을 깊이 깊이 감추고 살아왔던 모양이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게될 정도로 깊이 깊이...

그러다가 어느날 물꼬가 터지면 저렇게 미쳐버리는 모양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스킨스쿠버라는걸, 몇년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저렇게 뛰어다니는걸 보니, 참, 꿈이란 무서운 것이로구나. 죽은 사람 하나 살려내는 일쯤은 여반장으로 해내는 놈이로구나

녀석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고 닥달을 한다. 결국 그나마 책상물림인 내가 일을 맡게 되었다. 일찍 퇴근해서 이력서를 쓰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이걸 프린트해서 밤에 만나 또 의논을 해야한다. 즐거운 일이다. 이게 도움이 전혀 안될 수도 있지만 어찌 즐겁지 않으랴

친구의 소생을 본다는 것은 -- 이게 잘 안돼서 저녀석 또다시 보기에도 짜증나는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는거지만 -- 꿈을 버리지 못하고 기를 쓰는 존재를 마주 대한다는 것은. 무더운 여름에 얼음 창고에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선득하고 정신 번쩍 드는 일이다.

즐거운 일이다. 마치 내가 무슨 큰 일 만난듯 나까지 흥분되는 일이다. 신나는 일이다. 세상은 이리도 즐거운 일로 가득차 있다. 이놈아. 차라리 이번에 안됐으면 좋겠다. 이런 기회 또 찾아서 뛰어다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지금 네 모습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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